충청,경상도

(대구골목투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고택

강릉꽁지 2012. 9. 18. 06:00

안녕 하세요.

대관령꽁지 입니다.


대구를 처음 여행할당시 늦은 시간이라

이상화 고택을 담 넘어 구경만하고 온적이 있는데 이번 여행에 둘러보고 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지만 

영원한 한국인 이상화,빼앗긴 들에서 민족혼을 일깨운 시인 입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곳을 둘러보며 다시한번 마음속으로 새겨봅니다.


주변의 공사와 골목투어를 하는 아이들로

정신이 없기는 했지만 잃었던 나라의 슬픔을 잠시나마 느끼는 시간을 했습니다.






대구에서 태어난 시인 이상화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우리 근대 시사에 너무도 큰 자취를 남긴 시인으로,

폭풍처럼 살다 간 파란의 생애는 정녕 우리 계례의 근대사

바로 그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화 시인은 험난한 근대사 속에서 준열한 자기 비판과

불 같은 저항정신으로 나라를 상실한 망국민들이 해야 할 책무가 무엇이며,

지조와 애국이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이 땅애도 저항문학이 존재했음을 실증한 사람이다.


그가 43년의 짧은 생을 살면서 애타게 절규한 것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조국의 참담한 현실이였고,

살아남기 위해 굴종을 숙명으로 알며 변절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슬픔이었다.


이러한 이상화의 울분과 통곡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처럼 서슬 퍼렇던 적 치하에서도

(시인에게),(통곡),(역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해를 먹다), 등 보옥처럼 빛나는 저헝적 서정시를 가질 수 있었다.


광복 63년의 해인 2008년 8월 12일 시민의 숙원이 이루어져

개관한 계산동 고택은 이상화 시인이 숨을 거둔 역사적인 장소일 뿐 아니라

집필이 된 시 (서러운 해조)를 마지막으로 써낸 곳이기도 해서 감회가 한결 더 새롭다.


우리는 시인의 숨결을 담고 있는 이 상징 공간이 영원한 한국인

이상화의 드높은 민족정신을 이어받는 교육장이 되어, 우리 지역만이 아니라 전 

한국인의 승모와 따뜻한 사랑을 받는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돌아

니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는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에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은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쁜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밞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고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옷을 푸른 설음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