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도

조선시대 한양도성에는 문이 몇개 였을까?...

강릉꽁지 2013. 11. 26. 11:03

조선시대 사소문의 하나인 광희문


조선시대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2동에 있으며,서소몬과 함께 죽은 사람을 내보내던 문으로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軀門) 이라고 불리었다.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인 남동쪽에 세운 문으로 1711년(숙종 37)에 고쳐 쌓았다.1719년(숙종 45) 석측 위에 문루를 짓고 "광희문" 이란 현판을 걸었다.구후 언제 무너졌는지 알 수 없으며 석축으로 된 기단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복원시 홍예석축(虹霓石築) 을 해체해 남쪽으로 15m 옮기고,문루 12평을 새로 짓고 주변의 200평을 녹지화했다.




▣조선시대 4소문 홍화문,소덕문,광희문,창의문


조선시대 도성인 서울 성곽의 4개의 작은 성문을 말한다.

동북의 홍화문(동소문),남서의 소덕문(서소문),동남의 광희문(수구문),서북의 창의문(자하문) 등 4개의 문을 가르켜 사소문 이라고 한다.

사소문 외에 남소문을 개설하였다가 1469년(예종 1) 폐문하였다.



홍화문은 혜화동에서 삼선동으로 뚫린 길 마루턱에 자리잡아 도성에서 함경도 등 북방과 직결되는 관문이였다.1484년(성종 15) 창경궁이 완공되어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년(중종 6)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혜화문은 도성의 소문 가운데 하나였지만 대문의 구실을 하였다.즉 경원가도가 여기서 연결되어 있었고,북대문인 숙청문이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행하였다.그리고 여진의 사신이 조공하기 위하여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하던 문이기도 하다.

처음 건립하였을 때의 문루는 언젠가 없어지고 1744(영조 20) 어영청에 명하여 문루를 건축하였다.이후 일제의 도시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문루는 1928년 헐리고,홍예와 석문마저 1939년 사라진 것을 1994년 길 마루턱 북쪽에 복원하였다.문루의 천장에는 대개 용을 그려 넣었는데,혜화문에는 성 밖의 새 피해를 막기 위해 봉황을 그려 모셨다고 한다, 



소덕문은 서소문동에서 의주로로 넘어가는 길 마루턱에 위치한다.1472(성종 3) 예종비 장순황후 한씨의 시호를 피하여 소의으로 개칭하였다.이 문은 도성 안 백성들이 죽어서 도성 서쪽으로 운구할 때 이용되는 문이였다.서소문 밖에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시전의 하나인 칠패시전이 있어 받달하던 성업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다.1396년 (태조 5) 건축 당시에는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있었으나 언젠가 없어지고 1743년(영조 19) 다시 문루를 건축하였다.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서소몬동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다.



광희문은 1396년 도성 축성 때 건축되었다.문 이름은 "광명의 문" 을 의미하나 개천 수구에 가까운 곳에 있어 수구문이라 불렀으며,도성 안 장례 행렬이 동쪽 성 밖으로 나갈 때 통과하는 문이어서 시구문이라고도 하였다.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의 중구 광희동에 있어 남소문이라 할 수 있으나 따로 도성에서 한강 나루터로 바로 통하는 문이 필요하게 되어 세조 때 장충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별도의 남소문을 건축하였다.그러나 남소문은 건립 후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풍수지리적으로나 실용적으로나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12년 만에 폐문되었다.조선 전기 왜국 사신들은 옥수동의 한강 두모포나루를 거쳐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 숙소인 동명관에 머물렀다.1915년경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만 남아 있었는데,1975년 서울 성곽을 수축하면서 홍예 석축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이전 복원하면서 문루 12평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창의문은 "의로움을 표창한다"는 뜻으로,경복궁의 주산인 북악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축조되었는데,1413년(태종 13) 지리도참설에 따라 문이 닫혔으며,지금도 닫혀 있다.그러나 1422년(세종 4) 숙청문과 함께 군인의 출입문으로 아였고,궁궐의 담장 축조나 국가의 큰 공사가 있을 때 일시 열어 통행하였다.1623년에는 인조반정의 반정군이 홍제원에 집결하였다가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열고 도성에 들어와 광해군을 쫓아냄으로써 인조 정권이 창출되었다.1741년(영조 17) 성문과 문루를 개수하면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 1등에서 3등까지 공신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었으며,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창의문은 서울 성곽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완형을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성곽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다.창의문 구조의 특징으로,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의 형상과 같아 그 기세를 제압하고자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형을 나무로 만들어 추녀에 매달아 놓았다.



조선시대 4대문 숭례문,숙청문,흥인지문,돈의문

 

 

1396년(태조 5) 도성의 정 남쪽에 숭례문(남대문),정 북쪽에 숙청문(숙정문),정 동쪽에 흥인지문(동대문),정 서쪽에 돈의문(서대문)을 세워 4대문 이라고했다.



숭례문은 600년 동안 한양을 둘러싸고 있었던 한양도성의 남쪽에 위치한 문으로,현재 서울시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대한민국 국보 1호이다. 서울의 상징이나 다름 없었던 건축물이며.도시 남문의 이름에 "남" 자가 안 들어가서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인의예지를 동서남북을 대응하는 방식으로 서울의 정문들 이름이 붙여진 이유다.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인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을 기준으로 이름이 지어졌다.동은 인(仁)을 기르는 흥인지문,서는 의(義)를 두텁게 하는 돈의문,남은 예(禮)를 숭상하는 숭례문,북은 지(智)를 기르는 흥인지문이어야 하지만 지혜를 뜻하는 지(智) 대신에 정(靖)자를 썼는데 이는 "꾀하다" 또는 "꾀" 라는 뜻이 있다.지혜 대신 살짝 비틀어 꾀라고 이었다고 하며,마지막으로 신(信)은 보신각으로 4대문의 중앙에 세웠다.

남대문이라는 명칭은 일제에 의해 강제개명될 때 붙여진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소문이 언젠가부터 퍼졌다.특히 숭례문 전소 이후 의식적으로 "남대문"을 피하고 "숭례문" 으로 부르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이런 오해가 널리 퍼지기도 했다.이는 잘못된 잔재론 중 하나로,사실 조성왕조실록 등에서도 백성들은 이미 편하게 남대문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많으며 단어 수도 남대문이 숭례문보다 더 많다.



숙청문은 숙정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4대 성문중 하나로,북쪽의 대문이라 일명 북대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4소문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유독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의 위치를 잘 모르는데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 2-1번지에 있다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하였으며,1963년 1월 21일 이후로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그로부터 5년 뒤 1968년 1월 21일 1.21사태가 일어나 봉쇄되었고,그로부터 40년이 더 지난 2006년 4월이 되어서야 일반인에게 공개되여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흥인지문은 동대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4대 성문중 하나로,동쪽의 대문이다.숭례문과 함께 서울 성곽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1396년(태조 5)에 처음 지어졌으며,이후 1453년(단종 1) 과 1869년(고종 6)에 고쳐 지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이여져내려오고 있다.

대문은 소문을 막론하고 서울 성곽에 존재하는 다른 문의 명칭은 세 글자로 되오 있지만(숭례문,돈의문,숙정문,홍지문,동소문 등) 특이하게 이 흥인지만만 네 글자로 되어있다.이는 고종 재위 때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는 이유로 그 기운을 북돋는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넉 자로 지었던 갓이다.동대문 바로 옆에 있던 개천(청계천의 옛 이름)이 흘러나가는 곳 이름이 오간수문,혹은 오간수구인 것도 같은 이치이다.

원래 흥인지문은 1943년 경성부에 구제가 실시되어 7개 구가 설치될 당시 동대문구 관할이었으나,1975년 동대문구 관활이었던 숭인동,창신동(흥인지문 바깥 지역) 일대가 종로구에 편입되면서 동대문 역시 종로구 관할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유명세나 중요도에 비하면 국보가 아닌 보물 1호라는 점이 좀 의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으나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문화재 당국에서 숭례문을 조선보불 1호,흥인지문 2호로 지정했던 데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광복 이후 1962년 우리 정부에서 문화재 보호체계를 만들고 국보와 보물을 지정할 때 일본 관리체계를 벤치마킹 하면서 굳어진 듯하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저러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돈의문은 서대문이라는 이명 때문에 서대문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사실은 중구 정동의 형재의 경향신문 사옥 앞 정동사거리 자리가 돈의문 터였다.다만 중구 정동을 비롯한 중구 서쪽 지역은 1975년에 서대문구에서 중구로 편입된 곳이기 때문에,1975년까지는 실제로 서대문구에 돈의문 터가 존재했던 게 맞다.동대문구와 같은 경우이기도 하다.

건설된 시기는 1396년으로 한양의 2차 성곽공사가 마무리 될때 지어진 8개의 성문중 하나로 세워졌다.그러나 1413년(태종 13)에 돈의문을 폐쇄하였다.이유인즉 태종시대의 대표적인 권신이던 이숙번의 집이 돈의문 근처에 있었는데 당연히 사람들의 통행이 많고 수레가 오가자 시끄럽다라는 이유로 돈의문을 막아버린것이다.사람들은 이숙번의 집을 지날때마다 "색문가" 즉 성문을 막아버린 집안이라며 손가락질을 했댔다고 한다.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조정에서 백성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 새로 길을 내고 대문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 길이 이숙번 집 앞을 지나게 되자 이숙번은 인덕궁 앞에 작은 동네가 있는데 거기에 길내고 대문을 만들자라고 해 조정이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이 서전문인데 여담으로 인덕궁은 상왕 정종이 기거하던 궁이었다.결국 이숙번이 몰락하고 1422년(세종 4)에 서전문을 철거한 뒤 폐쇄된 돈의문을 다시 수리해 개방했다.이후로 조선왕조 내내 존속하다가 세월이 오래되어 성문과 성루가 낡게되자 1711년(숙종 37)에 다시 짓게 되었다.이때 다시 지으면서 새문,신문이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는데 그래서 구한말에 정동에 세워진 새문안교회가 새문 안에 세운 교회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또한 육조거리에서 돈의문까지 잇는 길을 새문안길(신문로)라 불렀으며,이게 현 도로명 체계에서도 그대로 굳어지게 된다.그러나 오랫동안 이어지던 돈의문은 일제에 의해 파괴되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일제는 경성을 재개발하겠다면서 그 과정에서 전철 복선화를 추진했는데 전철을 복선화하려면 돈의문이 걸림돌이 되었다.결국 일제는 편리하게 돈의문을 철거하고 전철을 복선화 하였다.

숭례문과 흥인지문만이 남아있던 탓인지 돈의문 이명인 서대문은 가족 지명에만 남아있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서대문은 어디있는지 관심을 안가졌다나는 점에서 비운의 대문이 되었다.일제가 철거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남아있었을 것이란 점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남아있는 일제때 촬영한 사진에 의하면 숭례문이나 흥인지문과는 달리 한가운데에 크게 문이 있고 성루에는 2층 누각인 숭례문,흥인지문과는 달리 단층 누각이라는 특징이 있다.복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던 끝에 서울시는 인근의 서대문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돈의문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글 내용은 다음에서 검색하여 쓴 글이다.

서울에 잠시 다녀 오면서 어릴적 자주 지나치던 광희문 생각이 나서 사진을 담고 포스팅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조선시대 한양도성에 문이 몇개가 있었을까 의문이 들어서 하나하나 조사해보았다.이렇게 한곳에 모아서 포스팅한 이유는 많은 사람이 우리의 역사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혹 글 내용을 옮긴것이 문제가 된다면 댓글을 다시면 삭제를 하겠다.



아래 사진은 광희문 누각까지 올라가 찍은 사진인데 이곳을 올라가면 안된다고 하여 제송합니다 이야기하고 급히 내려왔는데 광희문 지기님이 이곳에 상주를 하면서 남대문 사고 후 철저히 지키고 계신다고 한다.지기님 말씀이 아저씨 같은분은 상관이 없지만 혹시 모르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혹시나 물어보고 오르려다 그냥 올라간 무지에 죄송한 생각이 든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 누구 때문에를 따지기 전에 복원 하여 후손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보고 느낄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그래도 서울시에서 서울성곽길이라는 길을 복원하여 사람들이 도심속 문화재를 접하는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다.

한양도성 4대문과 4소문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성곽길 투어를 시간내서 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꽁지네 대관령황태,명란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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